• 러시아 침공 대비해 ‘21세기 판 마지노선’ 구축하는 발트3국|동아일보

    러시아 침공 대비해 ‘21세기 판 마지노선’ 구축하는 발트3국|동아일보


    발트해를 접한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이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국경 지대에 ‘21세기 판 마지노선’을 구축한다. 마지노선(maginot line)은 1929년부터 1938년까지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국경에 건설한 대규모 요새 지대를 말한다. 전체 길이가 750㎞에 달했던 마지노선은 국경 감시 초소, 통신센터, 보병 대피소, 바리케이드, 포병, 기관총 및 대전차포, 대형과 소형 벙커 등으로 구성됐다.

    발트해 봉쇄 위험 처한 러시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1월 23일(현지 시간) 리투아니아 상공에서 실시한 비행훈련 사진을 공개했다. [나토 제공]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 러시아 군사동맹 벨라루스와 각각 국경을 맞대고 있다. 라트비아는 러시아·벨라루스와,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다. 이 발트3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정학적 중요도가 커지고 있다. 군사 중립국이던 핀란드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고, 스웨덴도 조만간 나토에 가입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칫 발트해가 봉쇄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발트해 제해권 확보를 위해 발트3국을 차지해야 한다.발트3국 입장에서는 심각한 안보 위협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다.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나토의 동부 국가들에 다시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에 대해 “우리 정보기관은 3년에서 5년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발트3국이 러시아의 다음 침공 목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발트3국은 국토 면적을 모두 합해도 러시아의 100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자그마하다. 리투아니아 340만 명, 라트비아 230만 명, 에스토니아 140만 명 등 발트3국의 전체 인구도 러시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발트3국 국방장관들은 1월 19일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고자 이른바 ‘발트해 방어선’ 구축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 내용은 발트3국이 향후 몇 년에 걸쳐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는 방어 목적으로 방어 구조물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한노 페브쿠르 에스토니아 국방장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경에 설비와 탄약, 병력 외에도 물리적 방어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안드리스 스프루즈 라트비아 국방장관 역시 “우리는 나토의 동부 전선을 수호하고 우리 적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발트해 방어 라인을 구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트해 방어선의 세부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과거 마지노선과 비슷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공세를 저지하고자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 구축한 방어요새처럼 발트3국도 러시아·벨라루스와의 국경 지대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매설하며 ‘용의 이빨(dragon teeth)’이라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용의 이빨은 탱크와 장갑차 등 기갑 장비의 전진을 방해하려고 만든 피라미드나 원뿔 모양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말한다. 러시아군은 자포리자 등 우크라이나군의 대반격이 예상되는 지역들에 용의 이빨을 수백㎞에 걸쳐 세 겹으로 설치했다. 러시아군은 용의 이빨 양쪽에 탱크 등이 빠질 만한 크기의 대전차 함정을 만들었고 지뢰까지 매설했다.

    32개국 연합훈련 벌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발트3국이 안보 위협에 휩싸이고 있다. [위키피디아]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발트3국이 안보 위협에 휩싸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의 국경 333㎞를 따라 6000만 유로(약 866억 원)를 투입해 벙커 600개를 건설할 계획이다. 각 벙커는 30~35㎡ 크기에 10인용으로 설계됐으며, 152㎜ 발사체의 직격탄을 견디도록 견고하게 만들 계획이다. 민간 토지 소유자와 협상을 거쳐 2025년 건설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에스토니아 국방부는 방어시설은 잠재적인 공격에 대한 조기 경보 시스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트3국은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등 각종 무기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협정도 체결했다. 발트3국이 사실상 군사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정한 셈이다. 게다가 발트3국은 지난해 미국과 방위협정을 새롭게 갱신했다. 이 협정은 미군이 발트3국의 군사기지에 주둔하며 작전을 수행하고, 유사시 병력과 장비를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리투아니아는 지난해 독일과 자국에 독일군 5000명을 영구 주둔시킨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독일이 외국에 자국군을 영구 배치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다.

    발트3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자 나토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냉전 이후 최대 규모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크리스토퍼 카볼리 나토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은 1월 22일부터 5월 말까지 유럽 전역에서 ‘확고한 방어자(Steadfast Defender) 2024’라는 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 훈련에는 나토 31개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눈앞에 둔 스웨덴 등 32개국이 참여한다. 병력 9만 명, 해군 함정 50척, 전투기 등 각종 군용기 80대, 탱크를 비롯한 전투차량 1100대가 동원됐다. 이는 냉전 시기였던 1988년 이후 최대 규모 훈련이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나토가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벌이는 사실상 첫 번째 지상 훈련이기도 하다. 카볼리 최고사령관은 “가까운 적(러시아)과의 새로운 분쟁 시나리오에 근거한 훈련”이라며 “나토가 수십 년 만에 새로 채택한 ‘지역 계획’에 따라 훈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나토는 지난해 7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의 유럽 공격에 대비한 군사 계획인 ‘지역 계획’을 채택한 바 있다. 이 계획의 핵심은 러시아 침공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31개 회원국이 병력 30만 명을 신속하게 집결시켜 30일 내 러시아가 침공한 지역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나토는 △북극과 대서양 △발트3국과 폴란드 등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 △지중해와 흑해 등 유럽 남부 세 지역을 중심으로 방위 계획을 수립했다. 롭 바우어 나토 군사위원장은 “이번 훈련은 나토가 북부 유럽에서부터 중부, 동유럽까지 수천㎞에 달하는 지역을 무대로 어떤 조건에서도 몇 달 동안 복잡한 다중영역 작전을 수행하고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토는 동유럽 전역에 걸쳐 전투 그룹 8개를 유지하고 있다. 4개 그룹은 발트3국과 폴란드에 있으며, 나머지 4개 그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추가로 창설됐다. 이들은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한 초기 최전선 방어 역할을 맡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번 훈련이 ‘나토 헌장 5조’(집단방위 원칙)가 발동된 상황을 가정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나토 헌장 5조는 나토 회원국 중 한 국가가 공격받으면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다른 회원국들이 자동 개입해 공동 방어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나토 31개 회원국 가운데 어느 한 국가가 공격받으면 나머지 30개국이 군사력을 결집해 반격에 나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토 헌장 5조가 발동한 것은 한 번뿐이다. 나토는 2001년 미국 9·11 테러가 발생하자 다음 날 헌장 5조를 발동해 미국에 대한 연대를 보여줬다.

    벨라루스와 협력하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8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기자들과 대담하고 있다. [뉴시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8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기자들과 대담하고 있다. [뉴시스]

    나토가 헌장 5조를 발동한 상황을 가정해 훈련을 진행하는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이다. 발트3국과 핀란드 등 일부 나토 회원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자국을 침공할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나토는 이 우려를 불식하고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자 헌장 5조가 발동된 상황을 가정해 훈련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토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결속을 강화하자 러시아는 자국 핵무기를 배치한 벨라루스와 연합국가 건립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월 29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통합 방안을 논의했다. 양국 정상은 3년 전 합의한 ‘연합국가 로드맵’에 따른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통합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자국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등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러시아는 지난해 6월 벨라루스에 자국 전술핵을 배치했다. 러시아가 자국 영토 밖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은 1991년 옛 소련 붕괴 이후 처음이었다.

    벨라루스 국방부는 핵무기 배치와 관련해 새로운 군사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연합국가 동맹이 무력 침공을 받으면 자국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1월 25일 전용기를 타고 칼리닌그라드를 방문해 발트3국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나토와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대결 국면에 들어간 셈이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26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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