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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북서쪽 끄트머리 태하리 해변에는 ‘대풍감(待風坎)’이 있다. ‘바람을 기다리는 절벽’이라는 뜻의 커다란 바위가 바닷쪽으로 삐죽 나와 있는 형태다.
울릉도에는 예로부터 배를 만들기에 알맞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아서 새로 배를 만들어 완성하게 되면 대풍감에서 바위에 밧줄을 매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세찬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돛이 휘어질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면 한달음에 동해안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동력선이 개발되기 전에는 울릉도에서 육지로 가기 위해서는 대풍감에서 북서풍이 불기를 기다려야 했다.
지난달 울릉도를 찾았을 때 대풍감 절벽 위를 올랐다. 대풍감에 오르기 위해서는 태하해변에 있는 태하향목관광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총연장 304m 길이의 모노레일은 20인승 짜리 2개의 칸으로 돼 있다. 정상까지는 약 6분이면 도착을 한다. 모노레일은 출발하자마자 최대 등판각도가 39도나 되는 급격한 바위산의 경사를 오른다.
그러나 급경사에서도 언제나 자동으로 수평을 유지해주기 때문에,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면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하차 후에 태하등대까지는 약 500m 정도를 걷게 된다.
태하등대를 지나면 태하향목전망대와 대풍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는 아랫부분이 철제 구조물로 돼 있는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대풍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바람이 올라온다. 추운 겨울에 대풍감의 바람을 제대로 맞아볼 수 있는 기회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왼쪽이 바로 대풍감의 주상절리 절벽이다. 절벽 바위 틈에서 모진 바람을 맞으며 대풍감 향나무들이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위태롭고 절박해서 더욱 아름답고, 희망마저 갖게 하는 작은 향나무들이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울릉도의 북쪽 해안이 펼쳐진다. 학포마을과 현포, 노인봉과 송곳봉(추산)이 어깨춤을 추듯 불쑥불쑥, 삐죽삐죽 이어집니다. 바다 위에는 코끼리바위(공암)가 귀여운 공처럼 떠 있다. 한국관광 100선, 10대 비경이란 찬사를 들을 만한 절경이다.
전라도 어부들이 고향가는 배를 기다리던 대풍감
조선시대 정부는 울릉도에 대해 ‘공도정책’ ‘쇄환정책’을 펼쳤다. 울릉도가 동해안에 들끓는 왜구들의 전초기지가 될 것을 우려해 섬에 주민들을 아예 비워놓는 정책이었다. 조선정부는 2~3년에 한번씩 울릉도에 수토사를 파견해 사람들을 수색하고, 일본인은 추방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다면 나라에서 아무도 살지 말라고 하는 울릉도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1882년 울릉도 검찰사로 파견된 이규원은 울릉도에 조선인이 140명, 일본인 78명이 살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조선인 140명 중 11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여수, 거문도, 고흥반도 인근에 살던 전라도 사람들로서 배 운항에 노련한 기술을 가진 뱃사람들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춘삼월 동남풍을 이용해 돛을 달고 울릉도에 가서 나무를 벌채하여 새로운 배를 만들고 여름내 미역을 채집해두었다가 가을철 하늬바람(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그리고 고기를 가득 싣고 하늬바람에 돛을 달고 남하하면서 지나온 포구에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면서 거문도로 귀향하였다.” (전경수 ‘울릉도 오딧세이’)
울릉도는 개척령 이전부터 전라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이른바 ‘나선’이라고 불리는 전라도 출신의 배가 천부 해안을 중심으로 많이 오갔다고 한다. 이들은 봄에 남동풍이 불 때면 배 한 척에 타고 건너와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하고 미역을 따고 고기를 잡아서, 울릉도에서 건조한 배를 각자 한 척씩을 몰고 돌아갔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말, 대풍감에서 북서풍이 불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전라도에서 울릉도까지 어떻게 동력도 없는 목선을 타고 오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해류와 바람의 힘이다. 울릉도에는 남쪽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쿠로시오해류(동한난류)가 있다. 봄에 이 해류를 타면, 남쪽에서 울릉도로 항해하기가 예상 외로 쉽다고 한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절과 해류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울릉도에서 다이빙을 해보면 해류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바로 울릉도 바닷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자리돔떼다. 원래는 제주 앞바다의 따뜻한 난류에 살고 있는 자리돔이 요즘에는 울릉도 앞바다에도 가득하다. 쿠로시오 해류, 동한난류를 타고 올라온 자리돔떼다.
태하해변산책로
대풍감에서 내려갈 때는 모노레일을 타지 말고 ‘태하해변산책로’ 방향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괜찮다. 태하향목전망대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울릉해담길 산책로 6-2코스가 나온다. 숲 속 길을 걸어서 내려가다보면 ‘가재굴’이라고 불리는 해변의 절벽 동굴이 나온다.
‘가재굴’의 뜻은 무엇일까. 울릉도와 독도에 남아 있는 ‘가제 바우’ ‘가재 바위’ ‘가제굴’이라는 이름은 바로 ‘독도 강치’로 유명한 바다사자(또는 물개)가 살았던 바위나 굴을 의미한다. 강치는 당시에 ‘가지어(可支魚)’로 불렸는데, ‘가제’ ‘가재’는 모두 강치를 지칭하는 말이다.
원래 울릉도에 살던 가지어(강치)는 20세기 초에 울릉도에서 밀려나 독도를 거점으로 살게 된다. 그런데 가지어는 일제에 의해 대거 도살되고 남획돼 멸종하기에 이른다.
태하해변산책로를 걷다보면 울릉도를 덮고 있는 조면암의 실체를 볼 수 있다. 화산활동에 의해 생겨난 조면암은 풍화작용으로 벌집모양의 구멍이 가득하다. 해변산책길을 걷다보면 날카로운 매와 독수리의 부리처럼 생긴 멋진 조면암 바위가 있다.
‘독수리 바위’ ‘매바위’로 불리는 바위다. 해변 산책길에서는 태하황토굴이 있는 황토구미도 볼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바위 밑의 붉은색 황토가 선명하다.
울릉도 지명에 남아 있는 전라도 방언
울릉도와 독도는 포항과 217km 떨어져 있는 동해의 외딴 섬이다. 주변은 수심이 2000m가 넘는 심해다. 그런데 경상북도에 속해 있는 울릉도의 지명에는 예상 외로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도의 ‘보찰바위’다. ‘보찰’은 전라도 지역 사투리로 ‘거북손’을 뜻하는 말이다. 거북손은 남해안 지역에서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생물로, 무쳐서 먹으면 별미다. 울릉도민들도 ‘거북손’이라는 말보다는 ‘보찰’이라는 말을 익숙하게 사용한다.
나리분지에 있는 ‘알봉’ 안내문에도 ‘전라도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러 왔다가 알처럼 생긴 봉우리라고 해서 ’알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이 붙어 있다.
또한 울릉도 해변의 곳곳에도 전라도 방언으로 된 지명이 허다하다. ‘통구미’ ‘황토구미’ 등의 ‘-구미’는 전라도 방언으로 해안이 쑥 들어간 지형을 말한다. 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좁고 깊숙하게 들어간 만을 뜻하죠. ‘대풍감’의 ‘감(坎)’도 ‘-구미’를 한자어로 표현한 말로, 바닷가 절벽에 움푹 들어간 땅이라는 뜻이다.
현포는 원래 옛 이름이 ‘가문작지’였다. 전라도 방언으로 ‘-작지’는 자갈돌들이 널려 있는 해변가를 말한다. ‘검을 현(玄)’자를 쓰는 현포는 바닷물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가문작지’(검은 자갈해변이라는 뜻)로 불렸다고 한다.
이 밖에도 ‘와달’(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긴 해안), ‘걸’(물고기나 수초가 모여 있는 넓적한 바닷속 바위), ‘독섬(돌섬)’ 등이 울릉도 지명에 남아 있는 전라도 방언이다.
그래서 독도의 영유권 분쟁에 있어서도 전라도 방언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온다. 바로 석도(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한다고 밝힌 ‘대한제국칙령 41호(1900년 10월27일자)’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대한 내용이다. 칙령에는 울릉도의 관할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라고 규정했다.
전경수 서울대명예교수(인류학과)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은 바로 위의 대한제국칙령에서 명시한 ‘석도’가 지금의 ‘독도’ 임을 증명하면 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전라도 방언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릉도를 내왕했던 전라도 흥양 지방(여수, 거문도, 고흥반도 등)의 어부들이 불렀던 ‘독섬’(돌섬의 전라도 방언)에 해답이 있다는 이야기다.
전라도 방언에서는 지금도 ‘돌’을 ‘독’이라고 부른다. ’독섬‘이라는 전라도 방언을 대한제국의 공문에서 한자로 ’석도‘(돌석+섬도)라고 적었다는 해석이다. 전 교수는 “우리가 요즘 부르는 ’독도(獨島)‘는 발음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이고, ’석도‘는 의미 중심으로 지은 이름으로 같은 섬”이라고 말한다.
조선 정부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정책을 펼쳤지만, 민초들은 매년 해류를 타고 배타고 섬을 찾아와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들고, 미역을 따서 바람을 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중요한 삶의 현장이 바로 ‘대풍감’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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